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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First Anniversary

Another year to create precious memories together

이스탄불에서의 임무를 마친 후에도 일리야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샌더스나 올렉이 무슨 수를 썼는 진 몰라도 그는 확실히 이 곳, 영국에 머무르는 게 틀림없었다. 솔로는 창틀에 내려놓은 뜨거운 홍차 탓에 동그랗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응시했다. 진눈깨비에 가까운 초가을비가 내린 템즈 강 건너로 흐릿하게 비치는 건물들의 형상이 보인다.


그는 쉬지 않고 달려온 지난 1년을 회상했다. 나폴리에서 빈치구에라 일당들을 상대한 후로 얻은 U.N.C.L.E 이라는 팀명부터 늙은 너구리같은 영국인과 독일 정비공, KGB 출신 파트너까지. 좋든 싫든 남은 기간 동안 CIA에 발이 묶여 있어야 하는 솔로의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나폴레옹 솔로는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간주하는 사람이다. 국가의 영광, 가문의 명예, 영예로운 훈장 따위는 전혀 달콤한 꿀이 될 수 없었고 CIA는 그를 꾀어내기 위해 협박에 가까운 거래를 강요할 수 밖에 없었다. 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수모를 겪지 않기 위해 충견이 된 레드 페릴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 말인 즉, 엉클 팀은 매 임무마다 그 어떤 정부 요원들보다도 깔끔한 마무리를 자랑하지만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임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만에 하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여전히 앞날 창창한 그의 인생을 막을 여지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는 파트너십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이 관계를 끊어낼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절 면식도 없던 러시아인을 변호해줄 이유는 없다. 가엾은 정비공 아가씨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솔로는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것이다. 세기의 예술가들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미술품을 위조, 절도해 온 그에게 새로운 신분을 증명해줄 여권 제작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테니. 그 동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모아둔 돈을 털면 남아메리카의 섬 하나 정도는 통째로 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새 이름이나 나이, 가족 사항들을 떠올리면 괜히 기대감에 부풀기까지 한다. 알버트 몬디고. 유럽의 귀족 출신이겠지. 대대로 이어온 소박한 미술관 사업을 통해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스테판 콜리는 유부남이다. 사랑스런 아내가 있는, 그러나 아직 2세 계획이 없는 신혼 부부일 거고. 회사의 인사처를 담당하는 성실한 사람일 거다. 솔로의 인생관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거의 존재하기 힘든 현실 —설사, 그것이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인 것은 사실이다.
 

샌더스가 꽤나 애를 먹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고소하다. 그는 나폴레옹 솔로라면 제 성에 못 이겨 또다시 미술관을 털 것이 분명하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고리타분한 정부 놈들을 위해 일을 해주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손 안에 놀아나지 않는다. 솔로는 단 한번도 본인에게서 한계라는 걸 본 적이 없다.
 

Beyond—. 솔로는 늘 무언가, 그 이상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일리야 쿠리야킨이나 개비 텔러로부터 구분 짓고 제 자존감을 높여본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영국 지부로부터 1주년 축하 파티 초청장을 받은 솔로는 언제까지고 이 같잖은 스파이 놀이가 지속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카우보이.”

 

호텔에 도착한 후로 영 얼굴보기가 힘들었던 탓인지, 웬일로 일리야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일세, 페릴. 영국은 마음에 드는가?”
“그럭저럭. 생각만큼 이상하진 않군.”

 

옅은 청회색 체크무늬 셔츠에 같은 푸른 톤의 재킷을 걸친 일리야는 전과는 다르게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모양이었다. 가르마 없이 포마드로 비죽거리게 세운 앞머리는 일리야의 솜씨가 아니었다. 채도가 낮은 오렌지 색의 넥타이 역시, 그의 취향이 아니다. 솔로는 일리야와 방금 전까지 호텔 방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 누군지 떠올려보았다.

 

“자, 자. 모두 잔을 들어 주시지요.”

 

솔로는 일리야에게서 눈을 떼고 단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홀의 제일 앞에 위치한 단상에 선 웨이벌리가 와인잔의 끝을 은색 포크로 가볍게 두드리며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독특한 줄무늬 정장은 잔뜩 신이 나 보이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단상의 바로 앞에서 구경하고 있는 개비는 커다란 청록색 귀걸이를 반짝이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일리야와 솔로가 홀에 들어선 것을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이 자리를 빌어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특히, 일등공신인 저에게 말입니다.”

 

조그맣게 웅성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웨이벌리의 실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솔로는 화이트 와인 한 잔을 가볍게 비우고 새로운 와인병을 집었다. 엉클 팀의 예산은 주로 호텔 숙박비와 음주류에 쓰이는 것이 틀림없다며 코웃음을 치려던 참에 일리야가 불쑥 잔을 내밀었다.

 

“Going soft, Peril?”

 

더욱 짙어진 미간의 주름이 대답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솔로는 임시로 병의 입구를 막아둔 코르크를 빼고 와인을 따랐다. 쪼르륵, 액체가 흐르는 소리와 함께 유리끼리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일리야는 솔로가 거의 절반이 넘는 양을 따르는 동안에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담기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와인이 넘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태생이 러시아인인 그는 보드카에 절여지지 않는 이상 취할 리가 없을 테니 조금은 욕심을 부렸다고, 솔로는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나저나 넥타이가 멋있어, 쿠리야킨. 날이 갈수록 옷감을 고르는 촉이 좋아지는 것 같아 내가 다 자랑스럽군.”
“쓸데없는 소리를. 드레스 코드라며 먼저 옷을 보낸 게 누군데. 그러는 너도 참 웃기는 모양세다. 병아리도 아니고 바보 같은 샛노란 타이라니.”
“놀랍게도, 페릴, 이건 금색이라네.”

 

불만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지. 솔로는 한술 더 떠서 누가 그 정장 세트를 보냈는지 본격적으로 물어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뒤에 신사분들, 저희 엉클 팀의 엘리트 요원들을 소개합니다. 불곰만큼이나 힘이 센 일리야 쿠리야킨 씨와 잔머리로는 족제비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폴레옹 솔로입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시죠.”

 

분명, 연회에 집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술이나 들이키고 있는 자신들을 겨냥해 비꼬는 것이 틀림없었다. 솔로는 웨이벌리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잔을 살짝 들었다 내려놓았다.

 

“이게 다 네가 수다스러운 탓이다, 카우보이.”
“자네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선 탓이야. 그래서, 그 넥타이는 누구의 솜씨인가? 그 요란한 머리 스타일도. 평소의 자네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전문가의 손길이죠.”

 

등 뒤에서 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정말인가? 페릴?”
“또 그 답답한 갈색 점퍼를 껴입을까 걱정돼서 말이에요. 도무지 내버려둘 수가 없더라고요.”
“그럴 리가 없다. 나도 연회가 뭔지는 알고 있다고.”

 

일리야는 창피해 하는 게 틀림없었다. 옅은 녹안 속에서 넓게 확장되는 동공이 돋보인다. 쑥스러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러시안 스파이는 한없이 움츠러든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이 자는 오히려 스스로를 숨기는 법을 몰라 가면을 놓치곤 한다. 무도회장과도 같은 이 곳에서 이미 제 피부에 꼭 들어맞는 가면을 쓴 솔로는 그런 그를 오만에 가득 찬 눈으로 업신여기곤 했다. 그 순간, 솔로는 자신의 방에서 내려다 본 템즈 강을 떠올렸다.

 

“그래서 제가 하는 수 없이 직접 포마드를 골랐다고요. 그리고 이 타이도 웨이벌리 씨의 도움을 받아 엄선한 거라고요.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생각해주고 있답니다.”

 

처음 엉클 팀과 조우했을 때, 그들은 동독을 탈출하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관계. 제 목을 조르고 테이블을 엎었던 일리야와의 첫 만남도 그리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솔로는 지금 같은 시간선에 놓인 이들은 다름 아닌 제 동료들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사실은 내가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되려 이기적인 척을 했던 건 아닐까.

 

“솔로, 뭐해요? 다같이 건배나 하자니까요? 웨이벌리 씨는 혼자 신이 난 모양이니 오늘은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죠.”

 솔로는 빈 잔을 흔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건배를 할 와인이 없군. 여기 이 테이블에 놓은 술은 모두 음미했으니…. 미안하지만, 나는 새 잔을 채우러 가보겠네. 희망찬 건배사는 다음에 듣도록 하지.”

 

개비가 민망해 하지 않도록 솔로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다음 최대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내려놓는 둘의 모습에 견고한 자기(瓷器) 가면에 금이 가고 있다. 이들을 믿나?

 

“나폴레옹.”

 

그런 그의 발걸음을 잡아 세운 것은 투박한 단어 하나였다.

 

“잔은 내가 채워 주겠다. 모두 기다리고 있잖아.”

개비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솔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산통 깨는 소리를 하며 1년에 몇 없는 일리야의 호의를 거절할 까봐 초조한 모양이다. 솔로는 찬찬히 돌아서서 이미 한 손에 병을 쥐고 있는 일리야의 앞으로 갔다.

 

“고맙군, 일리야.”

 

유리잔 아래에서부터 채워지는 액체 위로 솔로의 이마와 일리야의 손목이 비쳤다. 붉은 적포도주 특유의 묵직한 바디감이 공기 중으로도 느껴지는 듯 했다. 솔로는 잔의 목을 받치고 위로 향해 들어올렸다. 그래. 대답은, 그렇다— 야.

 

“For Uncle.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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