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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eption AU

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문득 시선을 들어 일리야는 빼곡히 김 서린 창문 바깥을 응시했다. 장식마냥 눈이 하얗게 말라붙은 창틀이 하늘 에이는 소리와 함께 잘게 덜컹였다. 러시아의 겨울은 해를 지칠수록 혹독해진다. 작년은 눈에 막혀 현관을 열 수 없었고, 재작년은 두 번이나 교체한 수도관이 터져 나갔고, 그보다 작년은. 2년 전의 설한을 떠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창이 재차 흔들렸다. 외투를 걸쳐 입고 두터운 목도리를 두어 번 감으며 일리야는 방을 나섰다. 문 앞의 눈을 치워두지 않으면 그 날 저녁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터였다.

다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은 것 같다. 언제였는지 시초를 짚어낼 수 없는 시기부터 상념의 끄트머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감각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있지는 않다.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것들을 억지로 쥐고 들여다본다. 무언가 놓치고 있어. 가만히 뇌까리고 있노라면 버릇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벽난로 옆에 기대 두었던 삽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일리야는 왼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시계판 위로 그늘이 얼룩졌다. 8시 32분. 서느다랗게 내리숙인 시선이 집요해진다. 호흡을 죽이고 시계바늘을 바라본다. 시계 초침은 멈추지 않는다. 꿈 또한 꾸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미 사위가 어둡게 내려앉아 이웃집의 불빛이 눈을 찌를 지경이었다. 굵어진 눈발이 거세게 관자놀이를 때리며 지나갔다. 어둠 속으로 익숙한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으나 아직이었다. 부옇게 일어선 입김을 입술 사이로 오랫동안 짓씹으며 일리야는 삽 끄트머리로 단단히 얼어붙은 눈을 긁어냈다. 마지막 미션이 끝난 이후로 위에서는 아무런 지령도 오지 않았다, 지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낌새도 오지 않았다. 버려졌다고 해야 할지, 도망쳤다고 해야 할지 일리야는 이따금 구분을 지을 수 없었다. 얼음이라고도 눈이라고도 할 수 없이 꽝꽝해진 하얀 길을 삽날로 내려쳤다. 경계가 불분명한 일들이 늘어갔다. 울리지 않는 전화와 멎지 않고 연속되는 시간. 잊은 것들만 해도-

 

-리야.

 

기척이 언제 다가드는지도 몰랐다. 기울였던 허리를 들며 뒤늦게 돌아보는 일리야에게 솔로가 눈웃음을 던졌다. 오는 것도 몰랐나? 무성해지는 눈 사이로도 여유로운 어조는 또렷했다. 답을 던져주지 않아도 자네도 녹슬었다느니 어쩌니 저 좋을대로 떠들어대던 솔로가 손을 움켜잡았다. 두터운 양 손이 삽자루를 쥐고 있던 손등과 손가락 사이를 감싸며 천천히 덮어들었다. 줄곧 차 안에 있었겠지. 담아두었던 숨이 새하얗게 부러졌다. 이만 데일 듯이 뜨거웠다. 손목부터 어깨와 뒷목을 타고 느릿한 오한이 돋아났다.

 

손이 얼음장 같군. 내가 그렇게 늦었나?

 

이마가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아랫입술 안쪽으로 드나드는 부연 김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시선을 낮춰 일리야는 솔로가 감아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침묵 끝에 마침내 그리 내뱉으면 조금 웃는 목소리다. 더운 호흡이 콧등을 간지럽혔다. 사과하지. 걸음을 떼어 솔로가 더욱 가까이 섰다. 손끝이 죄어오듯 바싹 옮아들었다.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며 몰아치던 바람소리가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추위와 온기가 동시에 살아난다. 골 안쪽으로 시끄럽게 울리던 이질감도 순식간에 잦아들고, 공간 속에 한 사람의 존재만 선연하다. 더디게 눈을 맞추고 이내 고개를 꺾어 입맞춰 오는 나폴레옹 솔로.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다가드는 입술이 믿을 수 없이 뜨겁다.

가장 구분 지을 수 없는 것. 정의할 수 없는 총집합.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천천히 일리야는 눈을 감았다.

 

집으로 들어온 솔로는 장작부터 찾았다. 훈기 물씬하도록 벽난로를 지피고 담요를 몇 개씩이나 가져왔다. 뱃속까지 후끈해졌다. 어거지로 불 앞에 담요를 칭칭 몸에 감고 앉아 일리야는 한참동안 불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답답하다. 드러내놓고 말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도 알록달록한 담요를 여며주는 솔로의 손길은 변함이 없었다.

 

5분만 이러고 있어주면 안 되나?

5분은 무슨. 네 놈 5분은 5분이 아니다.

 

도끼눈을 치뜨는 눈매가 한두 번 당해본 모양새가 아니었으나 솔로의 미소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녁 먹기 전까지 만이라도 해주게. 앞치마를 두르며 돌아서는 뒷모습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거실에서도 요리하는 솔로는 충분히 들여다보였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솔로를 노려보던 일리야는 불로 눈길을 돌렸다. 이마께가 천천히 달구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불똥이 튀어오르는지 벽난로 안에서 딱 소리가 터졌다. 눈동자 위로 주홍빛이 번지며 일렁였다. 고소한 내음이 공기 중을 넘어들자 일리야는 눈을 깜박였다.

 

...개비는.

오, 잘 지내고 있다네.

 

매일 솔로는 개비를 확인하러 출타했다. 보안상의 이유로 일리야까지 동행했던 경우는 없었다. 2년 간 어떠한 변동도 없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커피와 와플을 시켜먹고, 정비소에 출근해 트럭을 손보고, 집에 돌아와 노래를 틀어놓고. 솔로의 여상한 묘사를 통해 개비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림처럼 다가왔다. 일리야는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변함없이 흘러가는 시계바늘은 개비가 정비소를 마치는 순간을 뇌리 속에 펼쳐놓았다.

마지막 임무였다고 감히 칭해도 될는지. 일리야는 포인트맨으로서, 솔로는 위조사로서 모집되었다. 건축가는 개비였으나, 최종적인 타겟 또한 마찬가지로 그녀였다. 명령된 임무의 내용을 아직도 기억했다. 한 사람의 존재를 세계에서 지울 것. 처음 브리핑을 들은 솔로는 보란듯이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타인의 의식에서 가브리엘라 텔러라는 독일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다? 실험의 한 가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보를 캐오고 기억을 왜곡하는 일은 해보았으나 이런 경우의 일은 맡아본 일이 전무했다. 왜 그냥 죽이지 않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첫대면이었던 솔로와 달리 개비는 그의 친구였고..., 그 다음 일리야는 멈추었다. 여전히 울렁이고 있는 불 속에서 초점이 살아났다.

옆자리로 접시를 든 솔로가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첫대면. 마지막 임무. 머릿속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딸깍이던 초침이 멎어들었다. 잠시 멈췄던 두통이 되살아났다. 리조또를 내미는 솔로를 보면서도 일리야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안 먹을 건가?

개비의 임무로 처음 만났었지?

음?

 

눈을 마주한 일리야가 치떴던 눈매를 더디게 누그러뜨렸다. 쓸어올린 탁한 금발 위로 불빛이 녹아 흘러내렸다. 2년간 보아온 표정은 제 것처럼 알기 쉬웠다. 접시를 내려놓고 솔로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개비의 임무 이후 일리야는 눈에 띄게 손을 떨지 않고 꿈을 꾸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자주 과거의 맥락을 놓쳤고 강박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바늘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일리야. 자네와 나는 2년 전의 임무를 통해 처음 만났어.

... ...

개비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개비의 기억을 지우기로 했고, 계획은 성공했지. 자네와 나는 러시아로 왔고. 기억이 나지 않나?

 

모를 리 없었다. 첫만남부터 서로 틀어졌고, 본래 혼자 일하던 일리야는 꼴좋게 망칠 뻔했다. 사람 약올리고 빈정거리는데 도가 튼 미국 카우보이. 손도 나빠 지갑을 뺏어가서는 놀리던 일도 있었다. 이후 욕조에 빠뜨리는 일로 돌려주었다. 솔로가 보지 못하도록 왼팔을 들어 이마를 짚으면서 일리야는 눈을 굴려 시계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 곳은 현실이다.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어째서 불분명한 지 알 수 없었다. 제 꿈을 스스로 설계하며 비죽 웃던 개비도 떠오른다. 점점 깊어지며 위태롭게 흔들리던 꿈과, 총을 쏘며 쫓아오던 경호원들. 뛰어내려야 한다고 소리치던 솔로, 짙어지던 웃음기, 뺨가를 쓸던 손. 솔로와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손길이 싫어지지 않았고, 마지막 정착지는 러시아였다. 결론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과도하게 부자연스러웠다.

 

러시아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지? 2년 전은-

쉬잇. 침착해.

 

손을 뻗어 솔로가 어깨를 감싸왔다. 불안해하지 마. 팔뚝을 쓸어내린 손이 어깨를 넘어가며 등까지 한 번에 안아왔다. 나직한 음성이 귓바퀴까지 흩는다. 빠르게 쏟아내던 문장들을 잠갔다. 서로 대면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심기를 건드리던 실체가 몇 마디로 호흡을 가라앉히는 감각이 기묘하기 짝이 없다. 수런하던 사념은 사그라들고 현실의 감각이 오감을 사로잡는다. 그제야 들쑤셔지는 숨을 체감하며 일리야는 솔로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두렵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개비의 임무 이후 일리야는 눈에 띄게 손을 떨지 않고 꿈을 꾸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자주 과거의 맥락을 놓쳤고 강박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바늘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타인의 손길이 닿은 토템이 제대로 기능할 리 없으니 말이다. 조금 더 힘주어 일리야를 끌어당기며 솔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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